지명유래

문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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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상세내용

기촌

문촌 중심 마을로 550여년 전 동래공 금휘 선생 (1435-1495) 이 골안 (고리안) 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후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여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으며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마을이라 하여 문촌이라하고 봉화 금씨 집성촌이다. 유형문화재 264호 종선정과 유종개 장군의 충신각 삼기당 금시양 선생의 위령비가 있다.

 

곳집 모퉁이

상여를 넣어두는 집을 일컬어 붙인 곳이다. 이 상여는 동래공 금휘 선생께서 충청도의 양전도경차로 계실 때 돌아 가시자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호상토록 할 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조각이 정교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았으나, 상여이므로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하는 것을 금하여 한적한 곳에 곳집을 지어 보관하여 장례 때 사용하였으나 1990년 6월경에 도난 당하였다. 특히 피리부는 총각, 처녀, 말탄동자, 메뚜기 등이 정교하였고 곳집 앞에는 옹기굴이 있었다.

 

사당골

동래공 금휘 선생이 사당이 있어 붙여진 골이다. 사당에는 임금이 선생에게 하사한 곤룡포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걸인이 침입하여 곤룡포를 덮고 죽어 있어 버렸다고 한다.

 

충신각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유종개 장군의 충신각이 있었다. 충신각은 안동묘에 옮겨졌고 1964년 삼기당 금시양 선생의 처사각을 고지바위 (고암) 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송실

종선정 옆에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맨 아랫쪽에 있던 소나무는 적암공 금재순 선생 (1545-1611) 이 심었다고 하며, 1950년대에 베어졌다고 맨 윗쪽에 있던 소나무는 매년 단오 때 그네를 매던 동수였으나 1986년 솔잎흑파리 피해로 고사하고 현재 12그루가 남아 있어 (수령350년, 높이 20m,둘레 3m) 면나무 11-29-9-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안동묘

종선정 건너편에 있는 작은 등성이며 당초에는 종선정 옆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마을에 온 중 (스님) 을 몹시 괄시하여 보내자 이에 앙심을 품고 산등성이를 끊어 하천을 내면 동네가 잘 된다고 하여 그렇게 하자 학 3마리가 날아가 버려 그 후 마을이 쇠퇴 했다고 한다. 안동묘는 이때 생긴 조그마한 산으로 성황당이 있어 매년 정월 대보름 자정에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제를 지냈다. 1980년에 밖 안동묘에 있던 충신각을 이곳으로 옮겼다.

 

사고터

태백산 사고가 생기기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지금은 부녀자들의 화전놀이터로 간혹 이용되고 있다.

 

마장들

옛날 봉성현 역마를 사육하던 곳이다. 또 사고에 관원이 올 때 타고온 말을 메어두던 곳이라고도 한다.

 

학생못

대청바위 아래에 학이 살던 곳이라 하여 학생못이라 추측한다.

 

대청넘이

종선정 좌측 얕은 등성이 넘어 있는 들이며, 높은 바위에 비봉대라는 각자가 있다.

 

뒷골

큰마 앞쪽 음지마, 뒤쪽으로 봄이면 외가리가 날아와 장관을 이루고 있어 군내있는 유일한 서식지이다.

 

승무지

성지미라고도 한다. 옛날 지라는 고승이 이곳의 산세를 살펴본즉 천하명당이라 너무 기뻐서 둥실둥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큰정지미,작은정지미가 있다.

 

부채등

마을 뒷산이 부채 형상이며 정상에는 큰바위로 되어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산꼭대기 바위가 험하게 생겨서 마을에 젊은 사람이 죽는 참상이 많아 바위를 부수었다고 한다. 부채등 중간지점에 옻불탕이 있어 옛날에는 문둥이 치료에 특효하다고 하여 많은 환자가 몰려오자 마을에서 개를 잡아 물 탕에 넣은 후 효험이 없어졌다고 하며 지금도 피부병 (옻 등) 에 씻으면 잘 낫는다고 한다. 가뭄이 심해도 수량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이면 망월놀이와 연날리기도 한다.

 

가시골

가시나무가 많다고 하며 100여 년 전에은 60여 호의 큰 마을이 있었다고 하고, 일설에는 이 계곡의 물이 나쁜 곳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문둥이가 된다고 하였다. 10여년 전까지 두세집 있었으나 지금은 한집도 없고 산림만 울창한 매우 깊은 골이다.

 

사부랭이골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라태자가 넘었다는 신라재 옆에 있으며 태자를 수행하던 사부랑이나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듯 하다. 또 작은 사부랭이골도 있다.

 

쿵자지골

신라골 안쪽에 있으며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라 태자가 행차할 때 북치고 쿵짝거리며 지나가던 곳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 추측되며 옛날에는 인가가 있었고 석굴이 있어 피난처로도 이용되었다. 일명 궁자지골, 군자지골, 준자지곡으로도 불리운다.

 

신라골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태자 내령군 (봉화 옛지명) 에 왔다가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어 같이 서라벌로 돌아갈 때 이 재를 넘어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중턱에 이쓴 약물탕은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그외 변소같이 생겼다고 통시골, 송구 벗겨먹뎐 송구대밭골, 꿩이 많이 살고 짐승이 많아 사람이 다니지 못하였다고 생치골 또한 안동묘에 있는 성황당 앞에 있는 곶감같이 생긴 바위를 곶감바우, 종선정 뒤쪽에 있는 정자등, 동래공 종택 뒷편에 있는 들이골, 저녁에 달뜨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다고 달기리, 봉황이 날아드는 형상이라하여 비봉대가 있는 비봉산, 골이 가마솥 형상이라하여 가매골, 큰 보가 3개 있다고 봇들,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는 토기를 굽던 골이라고 정골, 아름다운 새색시가 나물 뜯으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애달픈 사연이 있는 색시골, 산딸기인 멍두딸이 많다고 멍두골, 왜정시대 금광이 있었다고 금정골, 석이가 많이 난다고 석이바위골, 굴바위골, 숫돌이 많이나서 숫돌장수가 모이던 숯돌목, 숫돌목, 숫돌목에서 명호 고감리 (골안) 삼거리로 가는재가 길어서 한나절 넘느다고 진송이재 등이 있다.

 

구진벨

구진이라고도 한다. 기촌에서 이 마을까지 오는데 냇물을 아홉번 건너야 한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낭떠러지 위에 길이 있어 구진벤달, 구진벨이라고 한다. 또 마을 뒷산이 큰 개가 새끼를 품고 누워서 젖을 먹이는 형상이라고도 하며, 옛날 구진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라고도 하며, 현재 김동대씨 집에는 절탑의 밑부분이 있으며 근처 밭에 오래된 기와 조각이 보인다.

 

묵노골

약 130년 전 평택 임씨가 개척하여 살던 곳으로 묵은 밭이 많다고 붙영진 이름으로 교통이 불편하며 산비탈에 다섯집의 각성이 살고 있다. 그외 옹기를 만드는 좋은 흙이 많이 나며 묵노골 뒤쪽에 있다고 뒷골, 골이 좁아 흙탕진다고 흘트골, 변두리에 있다고 갓골, 골이 깊고 옹기골이 있어 깊으실,산이 불툭 튀어나오고 숲이 많아 범이 자주 나온다고 범돌이, 범등 등이 있다.

 

기프실

운계와 문촌의 경계에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으며 지형이 깊은 골 안에 위치한다고 깊으실이라 하며 윗동네는 웃기프실, 아랫동네를 아릇기푸실이라고 한다. 기프실앞 상운-봉성간 군도변에는 수령이 약400년 가량되는 느티나무가 있어 군 보호수 (11-29-13) 로 지정되었으며 1931년까지만 해도 7집 있었으나 이농현상으로 한집도 살고 있지 않다.

 

갈고

웃기촌 서쪽 산허리에 100여년 전에 촌락에 형성되었으며 특히 칡이 많이 나는 골이기도 하며 검성골과 웃기촌과는 갈라지는 곳이라 하여 갈래골, 갈골이라고도 부른다. 개척 당시 김해 김씨가 몇집 살고 있으나 지금은 경주 김씨 등 7가구가 살고 있다. 갈골 뒤쪽에 옛날에 커다른 우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그 밑에 여우들이 많이 살았다고 우렁바우골, 샘물이 기막히게 좋아 샘골, 갈골 윗쪽에 있다고 웃갈골, 도장골, 바당골, 베신데이, 장구목 등이 있다.

 

웃기촌

기촌 위쪽에 있으며 상기촌이라고도 한다. 현재 경주 김씨 집단부락으로 주산물은 수박,고추 등으로 농사지어 인근부락 중에서 부자마을이라 일컫는다. 1962년 문촌국민학교가 설치되었으나 농촌 인구 감소로 1988년 폐교되어 학교 건물은 현재 동성섬유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치골

서창골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춘궁기 구휼곡 창고 (나라에서 봄에 백성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는 일) 가 있던 자리라 한다. 경상감영에는 이러한 창고가 몇군데 없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3집이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검성골

마을 모양이 성을 쌓은 듯하고 약 400여년 전 봉화 금씨가 처음 정착한 곳이나 지금은 여러 성15가구가 살고 있으며 특히 검소한 생활을 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금성골

봉화 금씨가 터를 잡았다하여 부른 지명이리고도 하며, 지형이 비단같이 산세가 수려하여 금성골이라고 전한다. 또 옛날 안개가 뿌옇게 끼어 인적이 드물었으나 어느 날 수염을 가진 노인이 자리를 잡고 살아 사람의 왕래가 생기므로 골을 하나더 얻었다는 득골도 있다.

 

새터

신기라고 하며 200여 년 전 웃기촌에 살던 인동 장씨들이 새로 자리를 잡으니 그 곳을 새터라 했다. 장씨 문중의 장복우씨가 일찍 예수를 믿어 김종숙 목사와 함께 1908년 교회를 세워 신문명을 전파하여 개화가 일찍된 곳으로 교회역사는 86년으로 봉화군내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 깊은 교회가 있다.

 

무진장

무진장재가 옛 신라시대부터 있어 봉화 금씨가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무진장으로 동네이름이 불리워졌다고 한다.신라시대 사찰이 있으며 경내에는 3층 석탑이 있으며 1963년도 경내에서 4cm가량의 소형 청동제 불상이 출토 되었으며 무진장재 현판이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자료 152호로 지정되었다. 또 무진장 뒤에 있다고 뒷실명바골, 말꼬리 형상의 마가미골, 등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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