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구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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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상세내용

귀네

큰마리라고도 한다. 원명은 구천이며, 옛날에는 이천,조천이라고도 했다. 약 450년전 옥천 전씨 야옹공 진사 응방이 개척 시거하여 앞 개울에 거북형상의 큰 바위가 있어 구천이라고 쓰고 귀네라 불렀다. 그러나 일제가 마을에 들어모면서 일본 헌병대 주재소 (요즈음 경찰지서와 같음) 가 설치되고 우리민족의 정기를 꺾는다고 거북바위를 파괴하고 龜川을 九川으로 고쳐서 행정구역을 설정하여 지금은 그 바위의 흔적이 없어졌다. 그리고 웃마 천방둑에는 약 300여 년된 노송이 20여 그루가 이루고 있어 지나가는 길손들 마음의 정취를 한껏 돋우고 있다.

 

야옹정

全氏종택 옆에 있으며 진사 야옹전응방 : 1491, 성종 22년-1554년, 명종 9년이 조부이신 단종절의신 휴계 전희철선생의 유훈을 받들어 관직에 뜻을 버리고 이곳 구천에 은거하여 정자를 세우고 도덕과 학문을 수련하고 평소 교분이 두터운 퇴계 이황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지월당과 장춘오 편액은 퇴계선생이 쓰고 야옹정 편액은 승지 이일삼이 썼다. 현재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자료 15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구산서당

웃마 등성이에 세워졌으며 귀암 전수동 (1791, 정소 15년-1862, 철종13년) 이 문장과 덕망이 겸비하여 문중제족과 힘을 모아 후학양성을 위하여 건립된 서재이며 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그후 귀암공 5대 주손 전경우가 중심이 되어1994. 9. 29자로 지방문화재 자료 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문동천

큰마에서 도기가는 길 오른편에 큰 바위들이 양족에 마치 출입문 같이 생겼으며, 그 안공에 들어서면 아늑한 골안에 동쪽 하늘잎이 맑게 보여서 옛날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어 많은 시인 묵객이 거쳐 갔으며 퇴계선생도 여기에서 시짓고 글짓기를 즐겼으나 지금은 연못의 흔적만 남아 있다. 그 외 마을 건너편에 밭이 많은 골이있어 남밭골의 어원변천으로 남박골, 골안의 산세가 곱고 훤하여 분통 같다고 분통골, 골안이 큰고 넓다고 광대골, 병풍 두른 듯한 훼방골, 산등성이가 마치 어린아이를 업은 듯한 업은골, 골안사람들이 어리석기는 하나 착하게 산다고 우직이, 정월 대보름 달맞이 하는 망월장등이, 또 도장골, 먹골, 일레방골 등이 있다.

 

도기

옛날 도자기 굽던 굴이 있었다고 하며 아주 옛날에는 오치실이라고 부르다가 도개라고 불렀는데, 구전되었오면서 도기라고 부른다. 또한 마을 모양이 오목한 도자기 같다고하여 도기라고 부렀다고 한다.

 

격양당

격양당전시천 (1647,인조 25년-1699,숙종25년) 이 당세 거유로 일찍이 관직에 뜻을 버리고 심산심곡을 찾아 토일리에 정자를 세워 학문을 수련하던 서재로 당대의 학덕이 높은 선빌들과 교유한 창수록과 격양다운등 많은 유고를 남겼다. 1980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건 하였다.

 

회랭이

옛날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이 많이 피었다고 호련이라고 불렀던 것이 현재의 회랭이로 어원이 변한 것 같다. 석문동천 건너편에 있는 골이기에 석문동천 정자에 모인 선비들이 건너산 밑의 호련을 보고 글을 짓던 연관된 곳이라고 짐작된다고 한다. 그 외 소죽통같이 길죽하게 생긴 골이라서 통박이라 부르는 통백이골, 도기마을 뒷재가 삿갓같이 생겼다고 삿갓재, 옛날 고개길 양쪽에 소나무가 많았다고 솔고개, 골안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모 (소류지) 이 있다고 큰솔, 작은도기 넘어 돌아간다고 도래골, 고개가 길어서 장고개, 골이 깊고 등성이가 높아 어둠이 빨리든다는 검은들, 작은 도기 등이 있다.

 

방골

냇물이 마을을 빙 돌아 흐르고 앞산도 마을을 아늑히 품고 있어 봄이면 진달래, 철죽이 흐드러지게 피면 마치 꽃속에 마을이 있어 꽃다운 마을이라하여 방골이라 부른다.

 

서낭뎅이

옛날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던 서낭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당집은 없고 돌무지만 남아 있다. 이곳은 이산면 두월리와 상운면 구천리의 경계지점이며 현재 영주시와 봉화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또 들이 넓어서 원들이,원들이 안에 있다고 안원들이 안에 있다고 안원들, 마을건너 있어 건내골, 옛날 복숭아 밭이 있었다는 복상나무골, 옛날 배씨 성의 조선시대 참판을 지낸 집이 있었다는 배참집골, 골안이 방같다는 골방골, 건내골 뒷산 큰바위 밑에 여우가 많이 살았다는 예수바골도 있다.

 

창팔

옛날 장수가 여덟이 났다고 하기도하고 또 옛적에 송계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를 창의라 하였으므로, 호의창자와 장팔의 팔자를 따서 창팔이라 했다고 한다. 위쪽 마을을 웃창팔, 아래쪽 마을을 하창팔이라 부른다.

 

하창팔

야성 송씨외 여러 성이 살고 있으며 동편으로는 구천으로 상운 봉화로 가는 길이 있고 서쪽으로는 이산면 두월리 동창재로 가는 길이 있고 아래쪽에는 평은면 천본리 멀래를 통하여 안동시 원천동으로 가면 안동 봉화로 가는 포장된 지방도가 나선다. 또 벼락이 떨어져 못이 생겼다고 벼락친골, 숲이 많이 우거져 숲골이라 하다가 숫골이 된 숫골, 옛날 송씨 성을 가진 장수 두사람이 돌을 들이다 놓은 다리라는 돌다리, 바람이 많다고 풍대밭골, 골 입구는 하나이나 골안은 두갈래로 갈라진 이등골, 사람의 정수리 가마와 같다는 가매골, 가매실 건너 보이는 이명대골, 뒷골 가장골도 있다.

 

웃창팔

창팔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영일 정씨, 안동 권씨가 여러집 살고 있으며 가장 북쪽에 산다고 북골이라고도 한다. 또 뒷등을 넘으면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덕골로 넘어가고 동쪽으로는 구천월들 방골로 가는 길이 있다.

 

창계 이사터

서원보다 낮은 곳을 이사라 하였으며 조선조 말엽 흥선 대원군(고종황제의 아버지)서원 철폐령에 철거 당하였으며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창계는 철거된 이사를 건립한 야성 송씨 선조의 호라고 한다.

 

봉우골

옛날 조선조시대 통신수단의 일종인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고 하며 그때부터 봉우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봉화대의 흔적만 남아있다.

 

벅골

옛날 법당 (절) 있었다고 해서 법곡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벅골이라 부른다. 동쪽은 큰벅골, 서쪽은 작은벅골이라 하며 요즘도 간혹 비가 올려고 하면 둥둥둥하는 북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 외 웃창팔 제일 넓은 들이라하여 큰골, 동쪽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동해골, 마당같이 적다는 마당골, 어린애를 죽으면 이곳에 묻어 애가 탄다는 애탕골, 외탕골, 옛날에 매를 날려 보내서 묘터를 잡았다는 매방재, 동예골, 갈구재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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